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튀르키예라는 신세계, 이스탄불은 뜨겁다

  • Editor. 곽서희 기자
  • 입력 2022.08.03 09:25
  • 수정 2022.08.03 0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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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랏의 언덕을 오르면 이스탄불이 보인다
발랏의 언덕을 오르면 이스탄불이 보인다

오늘의 튀르키예가 낯설다면 비단 변경된 국호 때문만은 아니다. 그건 그가 빠르게 어제와 이별하고 있단 증거다. 그리고 그 중심엔, 예술 신세계가 있다.

휴일 아침, 발랏의 일상
휴일 아침, 발랏의 일상

 

●낡고 날것들의 동네


“그 이름, 진짜 마음에 안 들었었다니까요. 우린 겁쟁이가 아니라고요.” 호텔 테라스에서 꿀 넣은 시리얼을 우물거리며 가이드가 말했다. 유엔(UN)의 승인을 받아 터키의 국호가 ‘튀르키예(Turkiye)’로 변경됐다는 뉴스가 뜬 아침이었다. “터키(turkey)가 영어로 칠면조 말고 겁쟁이, 루저란 뜻도 있잖아요. 그래서 작년부터 정부가 국호 변경 캠페인을 진행해 왔죠.” 그렇게 어제는 터키를, 오늘은 튀르키예를 여행하는 중이다. 문득 아직 입에 붙지 않은, 딱 그 이름만큼만 낯선 땅을 밟고 싶어졌다. 아주 낯설고 낯선 나머지 나를 제외한 모든 공기가 다 ‘바깥’에 있다고 느껴지는 그런 땅으로. 이게 여행 첫날 나를 태운 택시가 왜 하필 이스탄불의 발랏(Balat) 지구로 향했는지에 대한 답이다. 

1, 3 컬러 천국, 발랏
컬러 천국, 발랏

색깔로 여행자를 유혹하는 여행지는 많다. 모로코와 이탈리아 부라노섬. 그리스 산토리니도 그렇고, 신안의 퍼플섬도 있었지. 그런데 여긴 그보단 좀 거칠다. ‘날것’과 ‘낡은 것’이 모인 곳. 날것이 낡아지고, 낡아져서 날것이 된 곳. 화려한 옷을 입고 있지만 어딘가 빈틈 많아 보이는 달동네. 이태원 해방촌에 색이 칠해지면 이런 느낌이려나. 
 

정제되지 않은 발랏의 분위기에는 이유가 있다. 1894년, 이스탄불을 강타한 대지진은 발랏의 생명줄도 끊어 놨다. 돈 있는 사람들은 마을을 떠났고 남겨진 자리엔 빈민촌이 형성됐다. 으슥한 골목길에선 마약이 불법으로 사고 팔렸다. 간당간당 숨이 끊어지던 마을에 다시 맥박이 뛰기 시작한 건 유네스코와 유럽연합의 도시재생 프로젝트 덕분이었다. 예술로 지역을 살리자는 목표하에 텅 빈 건물과 거리엔 마약 연기 대신 색색의 벽화가 피어올랐다. 지금도 이스탄불의 예술가들은 도심부의 비싼 월세를 피해 상대적으로 저렴한 발랏에 와서 작품 활동을 펼친단다. 

SNS 명소가 된 우산 카페
SNS 명소가 된 우산 카페

발랏은 요즘 현지인들도 인정하는 ‘이스탄불에서 가장 핫한 동네’다. 프로젝트의 성패는 최근 10여 년 동안 발랏의 집값이 오르고 카페와 공방이 늘어난 것만 봐도 예측할 수 있다. 예술가들의 손에서 탄생한 일명 ‘우산 카페’는 어마어마한 SNS 명소가 됐다. 사진을 찍기 위해 기다리는 관광객들의 줄이 마치 기다란 혈관처럼 보인다. 뜨겁고 울컥이는 활력이 마을 구석구석을 타고 흐르는 중이었다. 

오래된 벽에 칠을 하는 건 발랏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다
오래된 벽에 칠을 하는 건 발랏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다

이스탄불이 일곱 개의 언덕 위에 세워진 도시라지만, 발랏엔 특히 가파른 언덕이 많다. 낑낑 오르다 보면 군데군데 갈비뼈가 드러난 건물들이 보인다. 칠이 벗겨진 오래된 집들도. 재생 사업이 진행됐어도 여전히 그렇다. 옛 건물의 모습을 보존하되 현대 예술을 조합시키고자 하는 재생 사업의 취지 덕분이다. 새로워졌으나, 변함없이 낡고 날(生) 것들을 위한 동네. 진정한 재생(再生)이란 그런 것이다. 

 

●신생 축제, 두 도시를 휩쓸다


만약 어느 도시를 여행하다 똑같은 포스터를 곳곳에서 자주 발견하게 된다면, 그건 뭔가 대단히 재밌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신호다. 이스탄불에선 분명 그랬다. 거리마다 펄럭이는 축제 포스터가 ‘컬처 루트 페스티벌(Culture Route Festival)’의 시작을 알리고 있었다. 이름이 좀 생소한데, 이래 봬도 지난해에 무려 700만명 이상이 방문한 튀르키예 최대의 문화 예술 축제다. 튀르키예 문화관광부가 자국의 도시 문화유산을 활성화하기 위해 팔을 걷어붙인 결과다. 올해 2회를 맞이한, 아직은 ‘신생’ 축제지만 원래 애들은 한 해가 다르게 쑥쑥 크지 않나. 무섭게 성장 중이다. 

갤러리가 밀집해 있는 이스티클랄 거리
갤러리가 밀집해 있는 이스티클랄 거리

이스탄불과 수도 앙카라 두 곳에서 열린 이번 축제엔 무려 6,000명 이상의 예술가들이 참여했다. 전시, 오페라, 콘서트, 공연, 워크숍 등 진행된 행사만 해도 2,000개가 넘는다. 전시 콘셉트도 색깔이 짙다. 1850년에서 1950년 사이 튀르키예에 거주했던 여성 예술가들의 작품부터 오스만 제국의 화려한 전성기를 재현한 오페라, 청소년 예술가들의 거리 전시, AI 기반의 디지털 전시까지. 하여튼 예술과 관련해선 없는 것 빼곤 다 있는 축제라고 생각하면 이해가 빠르다. 예술 애호가들이라면(사실 그렇지 않더라도) 하루하루 시간이 훅훅 닳는 아찔한 기분을 느낄 수 있다. 

아타튀르크 문화 센터
아타튀르크 문화 센터
아타튀르크 문화 센터
아타튀르크 문화 센터
아타튀르크 문화 센터에서 열린 디지털 전시와 오페라 
아타튀르크 문화 센터에서 열린 디지털 전시와 오페라 

이스탄불의 컬처 루트는 ‘베이욜루 컬처 루트(Beyoğlu Culture Route)’라고도 불린다. 아타튀르크 문화 센터에서 이스티클랄 거리를 지나 갈라타 포트까지 4.1km의 루트가 베이욜루 지구에 걸쳐 있기 때문이다. 튀르키예 문화관광부가 최근 몇 년간 복원한 수많은 역사, 문화적 건축물들을 쭉 훑을 수 있는 루트이기도 하다. 이중 메인 스폿을 꼽으라면 역시 아타튀르크 문화 센터(Ataturk Cultural Center)다. 리모델링을 거쳐 작년 10월에 문을 연 세계에서 4번째로 큰 아트센터로, 튀르키예 국립 예술 기관들의 중심 역할을 한다. 이 밖에 아틀라스 극장과 시네마 박물관, 전통 군무 세마(Sema) 공연을 볼 수 있는 갈라타 메블레비 롯지 등도 모두 이 루트에 포함돼 있다. 

신시가지의 골목 시장
신시가지의 골목 시장

루트는 신시가지를 관통한다. 그러니까, 아야 소피아 성당이니 블루 모스크니 하는 메이저급 관광 명소들이 집합해 있는 구시가지가 아니란 얘긴데, 이런 위치 선정엔 지금껏 비교적 주목을 덜 받은 신시가지로 관광객들의 이목을 집중시키려는 의도도 함축돼 있다. 균형 잡힌 도시의 부흥, 그건 축제의 또 다른 목표 중 하나였다. 

축제 포스터가 외친다, 여기 재밌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고

‘신’시가지에서 열리는 ‘신생’ 축제. 혁신적인 작품을 안고 앞다투어 데뷔전을 치르는 ‘신진’ 작가들. 예술을 발 구름판 삼아 ‘도약’을 꿈꾸는 지역들. 모든 것이 거듭 새로워지고 있는 이 도시에서 670여 년의 역사를 품은 갈라타 타워(Galata Tower)는 유독 묵직한 존재감을 발한다. 전망대에 오르면 보스포러스 해협이 한눈에 담긴다. 조각조각 오려 둔 뒤, 마음이 허전할 때마다 꺼내어 붙여 보고 싶은 풍경이다.

갈라타 타워에선 이스탄불이 한 컷에 담긴다

이스탄불은 지구상에서 유일하게 국토가 유럽과 아시아, 두 대륙에 걸쳐 있는 도시다. 동양과 서양, 기독교와 이슬람교는 오랜 세월 이 땅에서 뒤엉키며 튀르키예만의 문화를 꽃피워 냈다. 이렇게 여러 문화와 물자가 섞이는 도시에서 자란 이들의 몸엔 예술가의 피가 흐를 수밖에 없었겠구나. 대립과 융합, 와해와 공존. 이 모든 것들이 예술적 영감의 싹이 되어 발아해 왔을 터였다. 동서양이 교차하는 하늘 위에서 나는 ‘어째서 이 땅엔 이렇게 위대한 예술이 넘쳐나는가?’란 물음에 대한 명쾌한 답을 들었다.

그랑 페라 세르클레 도리엔트
그랑 페라 세르클레 도리엔트
그랑 페라 세르클레 도리엔트
그랑 페라 세르클레 도리엔트
도예가 후레야 코랄(Füreya Koral)의 작품
도예가 후레야 코랄(Füreya Koral)의 작품
메셔 미술관
메셔 미술관
갈라타 포트 근처 쇼핑몰에서 열린 사진전
갈라타 포트 근처 쇼핑몰에서 열린 사진전
아틀라스 시네마 박물관 
아틀라스 시네마 박물관 
이스탄불에선 버려진 공사장도 갤러리가 된다
이스탄불에선 버려진 공사장도 갤러리가 된다

●신세계에서 구세계로


이스탄불은 뜨겁다. ‘세계에서 가장 뜨거운 여름 콘테스트’를 하면 아마 이스탄불의 여름이 못해도 3등은 할 거다. 이런 날씨엔 드리클로(땀 억제제)만이 살길이다. 턱살이 발발발발 떨릴 정도로 울렁이는 버스에 올랐다. 에어컨 하나 없는 차내, 체감 온도는 40도. 내리쬐는 태양과 타들어 가는 피부. 저 멀리 빛나는 돔이 보인다. 구시가지에 닿았다. 

메이저급 랜드마크가 밀집해 있는 구시가지
메이저급 랜드마크가 밀집해 있는 구시가지

우린 여행을 할 때 가장 여행을 잊는다. 걷고 먹고 자다 보면 낯설었던 현실에 대한 감흥도 빠르게 상실되곤 한다. 실감이란 게 그렇게 무력하다. 그럴 때 그 익숙함을 처참히 깨부수는 건 랜드마크들이다. 랜드마크가 지닌 힘이란 생각보다 강렬해서, 주변을 서성이기만 해도 그 도시에 왔다는 사실이 몸 전체에 파동처럼 전해진다. 이스탄불의 리얼리티는 아야 소피아 성당에 있다. 말하자면 이런 거다. 보자마자 ‘와, 이스탄불이군’ 하는 감탄사가 나오는 곳. 이스탄불이 그곳에 있었다. 신시가지와는 확연히 다른 분위기였다. 신시가지가 ‘예술 신세계’라면 구시가지는 ‘역사 구세계’, 그것도 먼지가 아주 뽀얗게 쌓인 어느 오래된 세계의 일부 같았다. 뉴(New)에서 올드(Old)로 옮겨지는 이 순간이 새삼스럽다.  

아야 소피아 성당, 신을 만나러 가는 길
아야 소피아 성당, 신을 만나러 가는 길

아야 소피아 성당은 그 자체로 이스탄불의 역사가 적힌 거대한 역사서다. 변천사가 꽤 굴곡진데, 로마제국의 황제 콘스탄티누스 2세 때 그리스도교 대성당이었던 이곳은 오스만 제국의 지배 때 이슬람 사원이 됐다. 이후 1935년에 박물관으로 개조됐다가 2020년, 에르도안 대통령의 행정 명령으로 다시 이슬람 사원으로 전환됐다. 이젠 새벽 4시에도 기도하러 오는 무슬림들로 성당 일대가 북적인다. 입장료는 무료가 됐다. 

톱카프 궁전도 구시가지의 대표적인 랜드마크 중 하나다
톱카프 궁전도 구시가지의 대표적인 랜드마크 중 하나다

성당에 들어가려면 누구나 신발을 벗어야 한다. 이쯤에서 다시, 이스탄불은 뜨겁다. 뜨거우면 땀이 나고, 땀이 나면 뭐, 아무래도 체취가 강해지기 마련이다. 무슨 말이냐면, 밀폐된 공간에서 수백 명의 발가락 냄새를 한번에 맡을 수 있는 랜드마크란 전 세계에 그리 흔치 않을 거란 얘기다. 성스러운 공간에 외람된 표현이긴 하지만, 여름에 아야 소피아 성당을 방문한다면 간장이나 된장 따위에 뭔가가 푹 졸여지고 있는 듯한 엄청난 냄새를 맡을 수 있다(뭘 상상하든 그 이상이다). 이런 날씨엔 역시 드리클로만이 살길이다. 

아야 소피아 성당 내부, 발 냄새 주의
아야 소피아 성당 내부, 발 냄새 주의

냄새의 장벽만 넘는다면 이후엔 천국이 보장된다. ‘비잔틴 미술의 최고 걸작’이라는 찬사를 받는 만큼 성당은 건축학적으로 무척 아름답다. 높은 층고의 실내엔 그리스도교의 흔적과 이슬람 건축 양식이 혼재돼 있다. 복잡다단했던 역사적 배경 탓이다. 예수와 성모 마리아의 모자이크 곁에 놓인 이슬람식 장식과 타일들. 그리고 꼬불꼬불 적힌 코란의 금문자. 한때는 따로 흘렀을 그리스도교의 시간과 이슬람교의 시간이 그렇게 공존하고 있었다. 그건 그 자체로 튀르키예의 역사였다. 

블루 모스크 너머로 기도 소리가 울려 퍼진다
블루 모스크 너머로 기도 소리가 울려 퍼진다

성당을 나오니 묵직한 저음의 울림이 스피커를 통해 퍼진다. 기도 시간을 알리는 소리다. 무슬림들은 하루에 다섯 번 기도를 올린다. 새벽, 낮, 오후, 일몰 직후 그리고 야간. 신에게 기도를 올리는 목소리가 곧 시계인 셈이다. 그들의 네 번째 기도가 시작되고 있었다. 맞은편엔 푸릇한 잔디 너머로 ‘블루 모스크’로 불리는 술탄 아흐메트 모스크의 돔이 노을빛을 받아 빛났다. 끝없는 울림과 끝없는 기도, 끝없는 이야기. 그건 인류가 아주 오래전부터 해온 것들이기도 했다.

 

글·사진 곽서희 기자  취재협조 튀르키예 문화관광부, 터키항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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