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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어질 결심

  • Editor. 이우석
  • 입력 2022.08.09 0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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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59. y20. 파란(碧)색 계열이며 천청색(淺靑色)이라고도 한다. CMYK 색상 코드(인쇄와 사진에서의 색 재현에 사용되는 체계)는 5AC6D0. 환상적 트로피컬 블루. 하지만 난 이 색을 봐도 전혀 들뜨지 않는다. 그저 청크린(변기세정액)이나 캔디바(빙과류) 같은 색이라 여기고 있다. 이 색으로 가득한 천국에서 주야장천 일만 하다 돌아왔기 때문이다. 

 

아니요


언제였나. 십여 년이 흘렀을까. H선배와 함께 몰디브에 취재 여행을 갔을 때다. 그때나 지금이나 한국인 허니무너의 버킷리스트에 꼭 빠지지 않는 곳이 바로 몰디브다. 원래 이름은 ‘디베히 라제’. 아쉽게도 난 이 이름을 외우거나 쉽사리 발음할 수 없다. 당연히 쓸 수도 없다. 인디아나 존스 박사도 풀 수 없는 난해한 현지 문자는 물론이며 와이파이 비밀번호 비슷한 조합의 영문 철자(Dhivehi Raajje) 역시 그렇다. 


그래서 모두, 그곳을 몰디브라 부르기로 비공식 합의했다. 영어로는 정확하게 몰딥스(Maldives)다. 국명에 ‘뛰어드는(dive)’이 숨어 있다. 그곳이 장미꽃으로 장식된 신방(新房)이었든 캔디바 색 바다였든 어쨌든 뛰어들게 되어 있다. 신혼여행객이나 벼루처럼 시커먼 피부의 해양레저 마니아들에게, 애초부터 딱 어울리는 곳이다.


H선배는 그때도 늙었다. 중후했던 당시의 나보다도 10살이나 많았다. 하지만 거봉 포도처럼 맑은 눈동자와 제철 방어처럼 지극히 유선형의 몸을 가졌다. 남양의 출장지에 와서도 랜선을 통해 내려온 일에 쫓기는 것이 아니라 매사를 즐길 줄 알았으며 그의 직급은 이를 충분히 보장했다. 


아침 산책을 하고 돌아온 H선배가 내게 물었다. “이 차장, 투명카약 타러 갈래요?” 나는 대답했다. “아니요!” 불경스럽게도 난 1초도 망설이지 않았다. “이 기자, 스노클링 하러 갈래?” “아니요!” 온통 투명하고 아름다운 빛을 발하는 바다 위에 올라앉은 근사한 워터빌라의 테라스.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난 ‘마감’하고 있었다.

몰디브를 울진처럼 즐기기 


보기 드문 산호섬 위로 숲을 품은 몰디브 럭스(LUX) 리조트의 아침으로부터 약 3,000마일 정도 떨어진 대한민국 서울 콘크리트 사무실의 저녁 마감 시간까지. 214KB(킬로바이트)의 문서와 138MB(메가바이트)의 JPEG 파일들을 무사히 전송하기 위해 새벽부터 일어나 애를 쓰던 순간이다. H선배는 다시 내게 물었다. “이우석씨, 이제 끝난 거야?” 난 다시 대답했다. “아니요!” H선배의 외마디 탄식. “젠장.”


그야말로 ‘아름다운 구속’이었다. 꼭 그때의 몰디브를 염두에 두고 만든 말 같다. 10시간이 넘도록 날아가야 하는 몰디브 군도는 약 1,200개의 산호섬으로 이루어졌다. 해발 2~3m 정도의 옥빛 거품처럼 보인다. 열심히 양치를 하다가 양변기 속 청크린 물 위에  양칫물을 뱉으면 딱 그 모양새다. 표현은 이렇지만, 몰디브는 내가 뽑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바다’ 순위에 항상 자리한다. 그것도 늘 상위권이다. 


럭스 리조트는 몰디브 환초 내 1,200여 개 산호섬 중에서 꽤 큰 섬에 있다. 그래서 답답하지 않다. 근사한 풍경의 인피니티 풀 2곳을 비롯해 스노클링, 낚시, 스쿠버다이빙, 수영, 카야킹(Kayaking) 등 다양한 해양 액티비티 코스와 밤하늘 영화관, 마사지숍, 야외 바 등이 있었지만 역시 나는 일만 해야 했다.


1개의 정기 연재물과 2개의 특집 마감이 악마가(?) 제시한 출장과 겹쳤던 까닭이다. 수순대로 나는 악마의 선택을 받아들였고 천국에서 일만 죽도록 하다 오는 천형(天刑)을 받았다(아마 법정 최고형이 아닐까). 구속 기간은 약 열흘. 싱가포르를 거쳐 가는 비행기 안에서 약 15시간을 미결수로 보냈고, 판결(?)이 난 나머지 기간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바다 위 로맨틱한 워터빌라 테라스에 갇혀 ‘울진 바다 여행’에 관한 기사와 ‘추석날 가 볼 만한 맛집’ 특집기사를 작성해야 했다.


직원과 나를 제외한 모든 이들이 물과 뭍에서 낭만적인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난 ‘계속 함께 뭔가를 하기’를 재촉하는 늙은 남자 선배를 따돌리며 우두커니 14인치 랩톱의 액정 화면을 뚫어지게 바라봐야 했다. 머릿속으로는 이미 잘 기억나지 않는 울진군의 어딘가 지명을 찾아 헤맸다.

 

돌고 도는 마감


사실 고백하자면 나는 그 외에도 충분한 전과가 있다. 리우데자네이루 이파네마 해변에서 혼자 긴 바지를 입은 채, 카메라를 노리는 날강도들의 공격을 경계하며 해변 풍경을 촬영한 적이 있다. 뜨거운 ‘핫키니’ 앞에 긴바지와 운동화 차림의 동양인 남자를, ‘이파네마에서 온 소녀’는 상상이나 해 봤을까.


멕시코 칸쿤의 코코봉코 클럽 앞에서도 ‘즐길거리’를 취재하느라 수많은 리조트와 그 앞 거리를 현지 경찰보다 더 자주 빙빙 돌다 돌아왔으며, 머리에 꽃을 꽂고 가야 한다는 샌프란시스코에선 무려 이틀 밤낮을 새며 고장난 랩톱을 고치느라 애를 썼다(기적적으로 하드디스크를 복구한 다음엔 35매짜리 기사를 써야 했다). 그 가파른 언덕을 오르는 케이블카도, 금문교도, 소살리토섬도, 졸린 내겐 모래바람이 불어오는 흐릿한 요르단의 사막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헤어질 결심이라나, 어느 겨울날 난 의기양양하게 사직서를 냈다. 언제나 멋진 곳에 가서 구속됐던 기자 시절의 경험은 지난 2020년 1월1일 부로 종료되었다. 만기 출소는 아니지만 22년간 복역(?)을 마치고 나왔다, 야호! 


해방이다. 산해진미를 차려 놓고 단식 중이라든가, 다양한 쿠바산 최고급 시가를 크레파스처럼 늘어놓고 성냥을 주지 않아 발만 동동 구르는 그런 경우는 이제부턴 없다. 최소한 그림 같은 휴양지에서, 일하는 상황만큼은 없겠다 자신했고 그런 마감과는 ‘헤어질 결심’을 했다.


그러나 과연 세상이란 마음먹은 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마감 감옥의 문을 활짝 열고 세상에 나온 나. 하지만 그 바깥이 더욱 거대하고 견고한 마감 요새였다는 것을 금세 깨달을 수 있었다. 게다가 그 누구도 탈출할 수 없다는 샌프란시스코의 ‘알카트라즈’와 같이 미적이고도 단호한 감옥이었다. 잠시 ‘기고만장(氣高萬丈)’했지만, 이후 ‘기고를 1만 장’이나 했다. 참고로 나는 현재 대중 미디어 5개와 폐쇄적 미디어 2개에 기고 중이다.


지금 나는 여름날의 부산에 와 있다. 비가 그치고 현재 눈부신 다리가 불을 밝히고 있는 부산 광안리 앞바다 호텔 로비에 앉아 <트래비>와 <문화일보> 마감을 하는 중이다. 와이프와 아이와 함께 있지만 난 와이파이와 연결되어 있다. 잠깐 페이스북에서 뭔가를 보고 피식 웃음이 났다. ‘트래비 여행작가 아카데미 수강생 모집’.


흠, 이 과정을 졸업하고 나 대신 감옥에 들어가 줄 ‘흥부’ 같은 누군가에 깊은 감사를 표하고자 한다. 누군가의 마감은 또 다른 누군가에게 전해지겠지. 그럼 난 곧장 모히토로 가서 몰디브 한 잔과 함께 해방을 자축하리라. 다이빙도 하고 투명카약도 타고. H선배는 과연 잘 계실까 궁금해졌다. 

*‘저세상’ 유머 코드와 황당한 상황극에 있어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이우석 소장은 오랜 신문사 기자 생활을 마치고 ‘이우석놀고먹기연구소’를 열었다. 신나게 연구 중이다.

 

글·사진 이우석  에디터 강화송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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