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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대로

Vladivostok

  • Editor. 곽서희 기자
  • 입력 2021.11.01 07:3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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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대에 갔다.
이제 와서 내가 할 수 있는 말이라곤
이것뿐이다. 

빛을 잃은 채, 바람을 견디는 등대
빛을 잃은 채, 바람을 견디는 등대

 

●시작점

 

등대에 가기로 했다. 
간밤에 폭설이 내렸고, 도시의 온도가 곤두박질쳤다. 숫자로만 존재했던 ‘-28℃’는 눈발과 바람과 공기가 되어 몸속 세포 하나하나에 닿았다. 지독하게 추운 블라디보스토크의 겨울이었다. 두 가지의 선택지가 있었다. 침대 위에 웅크리는 것과 등대로 가는 것. 이불을 걷었다. 패기를 넘어 거의 자해에 가까운 결정이었다. 

남을 거야, 떠날 거야? 호텔 방 커튼이 묻는다
남을 거야, 떠날 거야? 호텔 방 커튼이 묻는다

바깥을 나서는 데엔 대단한 각오씩이나 필요했다. 콧속을 뚫고 뇌까지 닿는 겨울바람을 버텨 내리란 각오, 유리조각에 허파가 찔리는 듯한 느낌을 감당할 각오, 속눈썹 끝에 매달린 얼음(이 된 수증기)을 과감하게 떼어 낼 각오 그리고 나선 것을 후회하지 않을 각오. 그런데 각오란 아무리 해 둬도 부족해서, 막상 현실이 닥치면 다 무용해지기 마련이다. 숙소의 두툼한 문을 밀자마자 모든 각오가 다양한 각도로 무너져 내렸다. 밖에선 매운 바람이 불었다. 그건 정말이지 와사비 같은 바람이었다. 눈물과 콧물이 번갈아 흘렀다. 허파가 쿡쿡 시렸다. 너무나 차갑고 맵짠 맛. 한겨울의 러시아 여행은 숨만 잘 쉬어도 성공이다. 


맥없이 무너지는 각오에도 눈보라를 헤치고 택시에 탔다. 눈길 위로 바퀴가 미끄러졌다. 열 걸음 뒤엔 숙소가 있었다. 돌아설 수 있었지만, 나아가기로 했다. 

등대로 가는 길. 눈보라가 양 볼을 때린다
등대로 가는 길. 눈보라가 양 볼을 때린다

 

등대 주위는 온통 얼음이었다.
바다와 바위와 바람이 차례로 얼었다.  
세상이 빠르게 냉각될수록 
마음은 물처럼 녹아 등대를 적셨다.

 

●그냥 등대

 

등대는 그냥 등대였다. 어떠한 수식어도 붙이지 않고 담백하게 말할 수 있는, 그냥 등대. 등대의 이름이 토카레브스키 등대(Tokarevskiy Mayak)라거나, 블라디보스토크 서남쪽 반도의 끝에 있다거나, 극동 지역에서 가장 오래된 등대라는 일련의 사실들은 이 작은 등대 앞에선 어쩐지 별로 중요하지 않은 듯했다. 

썰매를 끄는 아버지. 아내와 아이는 세상 가장 안전한 방법으로 등대에 도착했다
썰매를 끄는 아버지. 아내와 아이는 세상 가장 안전한 방법으로 등대에 도착했다

등대는 초라했다. 바다는 얼었고, 배는 멈췄다. 등대는 등대의 역할을 잃었다. 누구에게도 빛을 내어 주지 못했다. 찾는 이가 없으니 빛이 없고, 빛이 없으니 찾는 이가 없었다. 언 바다에서 등대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그 자리를 지키는 것, 봄을 기다리는 것, 바다가 녹을 날을 세어 보는 것 정도였다. 불모란 건 결국 그런 뜻이다. 


바람이 불었다. 방한용품은 없느니만 못했다. 바람 끝에 갈고리라도 달렸는지 볼이 계속 베여서 빨갛게 부풀어 올랐다. 등대를 보고 누군가 말했다. “이게 다야?” 사람들은 등대에게 너무 많은 것을 기대하는 경향이 있다. 열렬히 반짝이며 어둠을 밝혀야 할 것 같지만, 등대는 그냥 등대다. 늘 반짝일 수 있는 존재는 세상에 별로 없다. 별 볼일 없는 등대에 기대앉아 아주 오랜 시간을 보냈다. 분침보다 시침이 더 빠르게 움직이는 듯했다. 그런 건 시계를 보지 않고도 얼마든지 느낄 수 있었다. 화려한 풍경은 감동을 주지만 초라한 풍경은 위로를 준다. 딱히 슬픈 일도 없었건만, 마음을 다독이며 등대 곁을 지켰다. 저 멀리 루스키 다리(Russky Bridge)와 항구가 보였고, 깨진 얼음 조각이 언 바다 위를 덮었다. 바람이 더 세게 불었다. 

언제쯤 잊게 될까, 이 풍경
언제쯤 잊게 될까, 이 풍경

이듬해에 나는 생애 가장 끔찍한 한 해를 보냈다. 마음이 깊게 베였고, 바람보다 더 매서운 것들이 상처를 후벼 팠다. 오래 앓았고 많이 아팠다. 숨만 쉬어도 이렇게 아플 수가 있구나. 인생은 숨만 잘 쉬어도 성공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깨닫게 됐다. 그때쯤이었던 것 같다. 남몰래 마음속에 등대를 세우기 시작했다. 블라디보스토크의 등대와 꼭 닮은 등대였다. 그리고 마음이 무섭게 냉각될 때마다 등대의 불을 껐다. 그렇게 하면 감정의 스위치도 잠시 꺼진 기분이 들었다. 그래도 힘에 부칠 때는 진짜 등대를 떠올렸다. 러시아 땅 어딘가에 홀로 매운 바람을 견디고 있을 등대를 생각하니 신기하게도 아픈 게 조금 덜했다. 혼자가 아니라는 기분은 인생에서 가장 처절하게 외로울 때 가장 필요한 것이다. 


영원할 것 같았던 슬픔은 어느 날 갑자기 종료됐다. 특별한 이유가 있었다기보단, 그냥 때가 되어서 사라진 것 같았다. 어떤 일의 끝이라는 것은 어쩌면 원래 이렇게 어이없고 조촐한 것 아닐까. 그럼에도 마음속 등대를 무너뜨리진 않았다. 누구나 살면서 비빌 등대 하나쯤은 갖고 있어야 하니까. 다만, 맵기만 하던 와사비 같은 바람이 훌륭한 조미료가 될 수 있다는 건 뒤늦게 얻게 된 교훈이다. 어떻게 조리하는가는 온전히 나에게 달린 일이었다. 


그래서 그날 등대에 왜 갔느냐고 묻는다면, 잘 모르겠다. 이제 와서 말할 수 있는 건 그냥 등대에 갔다는 것이다. 그냥, 그냥 등대에 갔다. 그것 외에 지금은,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다. 

 

글·사진 곽서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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